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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짓기/의식의 흐름

구원

by 고라닭 2024. 4. 11.

 오늘은 초승달이 선명하게 비친 날이었습니다. 밤하늘을 내내 밝히는 보름은 오가며 종종 마주쳤었는데, 이렇게 얇은 초승은 오랜만이었습니다. 그간 몇 번의 초승이 날 지나쳐갔을까요. 앞으로 몇 번의 초승달을 더 볼 수 있을까요.

 

 글을 쓰지 못한 몇 달이 있었습니다. 나쁜 날씨를 견디지 못한 건 아닙니다. 공중으로 흩날린 문장과 문단과 문단들... 그건 무력감이 아닌, 구원에서 비롯된 분해였습니다. 나는 식물이었습니다. 언젠가 멀리로 떠나겠다는 소망을 지닌 한해살이풀. 그러나 지금은 조금씩 달리고 있습니다. 숨은 가쁘지 않고 다리는 약간 피로합니다. 발걸음에 맞춰 숨을 쉬기도 하지만 마음대로 편하게 호흡해도 달리기에는 별 지장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심폐력보다는 근력이 문제겠죠.

 

 딱딱한 바게트. 넘실대며 흐르는 수영장 물. 귀로 파고드는 바람살. 잡담소리. 김밥. 강의실과 삭막함. 저릿한 통증과 건조함. 몇 달이면 사라질 수도 있는 짧은 인연들. 나는 지금 어려운 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어느 날은 잔디 광장에 놓인 쿠션에 몸을 뉘었습니다. 아득한 구름들. 구름들에게는 얼마나 간단해보일까요. 그저 더 친절하면, 더 사랑하면 될 텐데. 그러나 너도 내려오고 나면 간단하지만은 않을 걸. 끊임없이 변화하는 구름의 모양. 그보다 더 위를 상상합니다. 모든 게 창백한 점 하나. 그곳에서 바라보면 전부 명료하겠죠. 탁 트인 풍경과 흐르는 생각이 나를 깨웠습니다. 살아있다는 기분. 모든 감각이 실존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압생트 풀밭 위 어지럽게 펼쳐진 태양의 입맞춤.

 

 그간 나는 '살아있음'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루의 흐름 이외에 영원한 건 없음을 손 끝의 감각보다도 현실적이라 느낍니다. 세계를 떠나서는 구원이란 없다는 사실도. '옳다'는 말이 의미 있어지는 유일한 세계는 태양이 따뜻하게 데운 돌, 혹은 돌연 파랗게 드러난 하늘에서 우뚝 커져버린 실편백나무가 알려주니까요. 나는 이 자리에서 곧장 까뮈를 읽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만날 사람들이 있어 나는 그간의 산보를 멈춘 뒤 다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시덥잖은 대화와 별 것 없는 음식. 의미 없는 웃음과 스며드는 추위. 멍청한 시간 속에 나를 흘려보냅니다. 살아 숨 쉰다는 것은 아무래도 별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근력이겠죠. 그러나 상관없습니다. 그러한 같잖은 것들이 나를 구원할 테니까요.

 

 물안경을 끼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코로 숨을 뱉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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